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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사람 사는 세상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2018. 1. 5. 금. 맑음

“일본, 광개토태왕비 비문 조작해 식민지 체제 정당화하려 했다”


일본이 광개토태왕비 원석을 조작,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병기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해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식민지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광개토태왕비 비문을 조작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세계전북서예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했으며, 평단에서 ‘서예를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서예학 연구자다. 

일본은 광개토태왕비에 쓰인 내용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일본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 가야에 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학설)을 주장해왔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391년 신묘년에 관한 기록이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라고 새겨져 있다. 일본 측은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속민(屬民)'은 '형제국가'를, '신민(臣民)'은 '신하국가'를 뜻한다.

일본의 해석은 지난 1883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사카와 가게노부(酒勾景信) 중위가 뜬 탁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사카와 중위의 탁본 입수 경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본 학계는 탁본 입수 후 바로 공개하지 않고 7~8년간 철저히 비밀로 하다가 지난 1889년 6월, 일본 관변단체 '아세아협회' 기관지 '회여록'을 통해 탁본을 공개하고 위와 같은 해석을 내놨다.

이를 두고 일본이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정황이 제기됐다. 지난 1972년 고(故) 이진희 일본 재일사학자(도쿄 와코대학 명예교수)도 "1900년 직전 일본 군부에서 '석회도부작전'(石灰塗附作戰·비문의 문자가 석회로 조작됐다는 주장)을 펼쳤다"며 조작설을 내놨었다. 그런데 일본 학계의 비판이 잇따른 데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학자 왕건군(王健群)은 지난 1984년 "석회칠을 한 것은 조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 탁본 업자들이 탁본을 깔끔하게 뜨기 위해 한 것"이라며 고 이 명예교수의 주장을 부정했다. 일본과 중국의 협공으로 '조작설'은 힘을 잃는 듯했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비 탁본이 우연히 김 교수의 눈에 들어왔다. 김 교수는 지난 1982년 대만에 유학 중, 탁본을 입수했다. 김 교수는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집을 보면서 임서(臨書·옛 필적을 옆에 두고 보면서 따라 씀) 하던 중 "쭉 써나가다가 어느 순간 붓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서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서예를 해본 사람의 육감"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김 교수는 해당 내용이 비를 세운 취지와 맞지 않다고 봤다.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치하하려고 세워진 비에 뜬금없이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부분은 '우연하게도' 고 이 명예교수가 변조됐다고 주장한 부분과 일치했다. 바로 '도해파(渡海破)' 세 글자다. 세 글자는 나머지 탁본에 있는 다른 글자와 확연히 다르다. 김 교수에 따르면 광개토태왕비에 등장하는 고구려 서체는 3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모든 획을 직선으로 처리하고, 가로획은 수평·세로획은 수직, 글자가 모두 네모 반듯한 모양이라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渡'의 마지막 부분 '乂'의 별획(별)은 광개토태왕비체의 별획처럼 곧은 사선이 아니라 중간 부분이 아래쪽으로 상당히 굽어 있다. 또 '海'자는 '母' 부분 첫 획과 두 번째 획이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다른 海자와 달리 오른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破'자도 왼쪽 石의 두 번째 획이 불룩하게 활처럼 굽어 있다. 비에 나오는 다른 '破'자는 왼쪽 石의 첫 획인 가로획과 皮의 두 번째 획인 가로획의 높이가 나란하지만 신묘년 기사의 '破'자는 皮가 石보다 아래쪽에 있다.

원석이 조작됐다고 김 교수가 생각하는 근거는 또 있다. 조작된 글자에 19세기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명조체'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명나라 인쇄물 글자꼴을 따라 '명조체'를 개발했다. 세 글자들의 획이 기울어져 있고, 특히 '破'자에서 皮가 石 보다 아래에 있다는 점이 그 근거다. 김 교수는 비문을 변조한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평소 자신의 필체를 남겼다고 추론한다.


그렇다면 '도해파'의 원래 글자는 무엇일까. '~에게 조공을 바치다'라는 뜻의 '입공우(入貢于)'가 유력하다. '입공우'를 넣으면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게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일본을)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즉 일본이 고구려에 직접 조공을 바치지는 않았으나 고구려 '속민'인 백제와 신라에 조공을 했으므로 고구려가 일본을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는 문맥이 완성되는 것이다.


만약 김 교수의 가설이 인정된다면 아베 정권 집권 뒤 다시 일본 국사교과서에 등장한 임나본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김 교수는 지난 2004년 이 주장을 학계에 발표한 뒤 다음 해에는 책도 냈지만 아직까지 한국 고대사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아직 많은 사람이 공인하지는 않았다"면서도 "나는 나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서예학적 관점에도 귀를 기울여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김 교수는 "일본 측의 주장에 꼭 동조할 필요가 없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 반박하고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면서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 아니라 아는 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http://www.kukinews.com/news/article.html?no=514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