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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사람 사는 세상

광개토태왕릉비

2018.1.11. 맑음

높이 6.4미터, 너비 1.4~2.0미터인 광개토태왕릉비는 그 높이가 아니라 '넓이' 때문에 한국인들을 경탄케 한다. 비석 주인공이 확장시킨 한민족 강토의 넓이가 한국인들의 가슴을 흔들어댄다. 고구려 군주의 정식 칭호는 태왕이다. 그래서 광개토왕릉비나 광개토대왕릉비가 아니라 광개토태왕릉비다.

그런데 일본인들 중에도 이 비에 자긍심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이런 이들이 일본 정부와 군부, 학계에 있었다. 이들은 4세기 후반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중 하나를 이 비에서 끌어냈다. 근거는 비문의 신묘년 부분이다. 광개토태왕 시절의 신묘년은 양력으로 391년 2월 20일부터 392년 2월 9일까지였다.

지난 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한 서예학자 김병기 전북대 교수도 신묘년 기사를 다루었다. 김 교수는 이 기사에 대한 일본 측 해석을 비판하는 동시에 서예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그의 견해는 논란을 일으켰다. 일각에선 그동안 학계의 연구 결과를 무시한 강연이었다는 비판도 나왔다.

오랫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광개토태왕릉비'

이 논란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판단하려면, 우선 김병기 교수가 강연해서 언급한 '신묘년 기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일본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신묘년 기사의 해석문은 이렇다. 아래의 A와 B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추가한 것이다.

"(A)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라서 조공을 해왔다. (B)그런데 신묘년 이후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일본 학자들이 제시하는 원문은 이렇다.

"(A)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B)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
(A)百殘新羅舊是屬民有來朝貢(B)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백잔은 해로울 잔(殘)에서 느낄 수 있듯이, 고구려가 백제를 낮춰 부를 때 사용한 표현이다. '□□'은 알 수 없는 두 글자다. 일본 학자들이 제시한 원문과 해석문에 따르면, 왜국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신하국으로 삼았다는 말이 된다.

지난 100년간 일본 역사교과서는 한 술 더 떴다. 학계 논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문의 '□□'이 동사가 아니라 '가야'를 지칭하는 명사라고 단정했다. A 앞부분에 백제·신라가 언급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장은 광개토태왕이 백제·신라를 어떻게 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가야는 이 문장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라' 앞의 '□□'에는 가야라는 명사보다는,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가 오는 게 순리적이다.

하지만 일본 역사교과서는 이를 무시하고 □□에 가야를 넣은 뒤 "신묘년 이후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에 관하여, 백승옥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2015년에 <동양학> 제58집에 기고한 '광개토태왕릉비문 신묘년조(條)에 대한 신해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해석은 학계에서의 논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100여 년 동안이나 일본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대(對)한반도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개토태왕릉비는 오랫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가, 1883년 일본군 장교 사카와 가게노부가 발견하고 일본군 참모본부에 보고했다. 1875년에 강화도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일본이 이 땅에 대한 경제 침략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이 비의 존재가 조선 정부가 아닌 일본 군부에 보고됐던 것이다. 일본은 6년간 비석의 존재를 비밀에 부치고 자체 연구에 몰두하다가 1889년부터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 후 신묘년 기사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됐다. 옛날에도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으므로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로 연결됐다. 하필이면 광개토태왕릉비를 한국침략 정당화의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일본 연구 결과 발표 이후 쏟아진 '반론'

이에 맞선 반론이 이미 80년 전부터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지금도 남북한과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반론의 핵심은 B 부분의 행위 주체를 왜국이 아닌 광개토태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백제·신라가 고구려를 황제국으로 떠받들던 상황에서, 모종의 사정변경으로 인해 태왕이 두 나라를 재차 복속시킬 일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론에 참여한 학자들은 제각각의 의견을 내놓고 있다. 100인 100색 양상이다. 한·일 양국의 민감한 문제인 동시에, 확실한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혼전 양상이다. 하지만 반론을 대체적으로 분류하면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현재의 비문에 적힌 글자를 그대로 인정하는 쪽과, 현재의 비문이 원래의 비문과 다를 거라고 보는 쪽이다.

비문에 적힌 글자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B의 행위 주체를 광개토태왕으로 해석하는 흐름은, 1938년에 역사학자 겸 독립운동가 정인보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이 흐름은 오늘날 남북한에서 통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에도 지지하는 학자들이 있다. 

쉼표나 마침표 같은 구두점이 표시되지 않은 고대 한문을 번역할 때는, 해석의 편의를 위해 구두점을 찍고 문장을 나눈다. 이때, 구두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일본측 해석 방식과 달리, B를 '(B-1)而倭以辛卯年來'와 '(B-2)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으로 분리하면, '일본이 신묘년부터 건너왔다'와 '광개토태왕이 해로를 통해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일본이 신묘년부터 건너온 일로 인해 태왕이 백제·신라를 재복속시킬 사정이 있었다는 쪽으로 해석된다. 일본이 제시한 비문에 따르면, B-2에 태왕이란 주어가 없지만, 문맥상의 행위주체가 태왕이므로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B-2의 두 번째 글자인 해(海)가 원래는 왕(王)이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렇게 되면 B-2의 행위 주체를 태왕으로 해석해도 무방해진다. 이것은 지금부터 설명하는 반론의 두 번째 흐름에 속한 학설이다.

두 번째 흐름은, 비문이 변조됐다는 전제 하에 B의 행위주체를 태왕으로 보는 것이다. 1972년 재일동포 역사학자 이진희가 처음 제기한 주장이다(비문 변조설). 비석에 석회가 칠해져 있을 뿐 아니라, 형태나 크기 또는 배열이 현저히 다른 글자들이 있다는 점에 근거한 주장이다.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한 김병기 교수도 이 입장을 따르고 있다.

이진희는 1994년 한국에서 발간된 <광개토왕릉비의 탐구>를 통해, 비석을 발견한 사카와 중위가 비문 일부를 변조한 데 이어, 1900년 전후에 일본군 참모본부가 변조 사실을 은폐하고자 석회 칠을 했다고 주장했다.



빨간 줄로 네모 친 부분이 도해파(渡海破) 부분.ⓒ 김종성



                                            ▲중국 길림성(지린성)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서울시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한편, 중국 학자 왕건군(왕졘췬)은 광개토태왕릉비문 탁본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국인 초천복(추톈푸) 부자가 탁본의 편의를 위해 석회 칠을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군에 의한 또 다른 석회 칠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또 형태나 크기가 다르고, 배열에서 튀어나온 글자들이 있는 점을 볼 때, 석회 칠과 더불어 글자 변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진희의 비문 변조설에 입각한 논문들을 쏟아내고 있다. 2016년에 <동아시아 고대학> 제43집에 실린 전희재의 '광개토왕릉비문 신묘년조 연구사 고찰'에 따르면, 남북한에서는 천관우·이도학·이형구·서영수·이도상·김영하·백승옥·임기중이 '변조설'을 지지하고 있다.

변조설을 따르는 학자들 중에는, B의 '왜(倭)'도 조작됐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형구·박노희는 B의 앞부분이 '이왜이신묘년래(而倭以辛卯年來)'가 아니라 '이후이신묘년불(以後以辛卯年不)'이라고 주장한다.

나중을 가리키는 후(後)가 고대 일본을 가리키는 왜(倭)로 바뀌고, 아닐 부(不)가 올 래(來)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 문장과 왜국은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 이를 기초로 해석하면,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신하국이었던 백제·신라가 신묘년부터 무언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이 이들을 재복속시켰다는 말이 된다.

한편,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김영하와 이도상은 B의 해(海)가 원래는 왕(王)이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일본 측이 제시한 바에 따르면, 원문 B에 문장 주어가 없다. 하지만, 김영하·이도상처럼 해석하면 B의 행위주체가 태왕이 된다.

전체 문맥에 부합하지 않는 김병기 교수의 해석

이번에 논란을 일으킨 김병기 교수는 B의 중간인 '도해파(渡海破)'에 주목했다. '바다를 건너와 ~을 격파하고'가 원래 비문엔 없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비문의 다른 글자들과 달리 이 세 글자는 19세기 일본에서 유행하던 명조체 글자로 쓰였고, 다른 글자들과 비교할 때 크기나 배열이 어색하다는 게 근거다.

이 부분이 변조됐다는 주장은 위에 언급한 학자들도 내놓았다. 이형구를 제외한 나머지 학자들은 세 글자 중 하나가 변조됐다고 주장했다. 이형구는 그중 두 개인 도해(渡海)가 변조됐다고 주장했다.

김병기는 원래 글자가 '입공우(入貢于)'였을 거라고 말했다. 이형구도 두 번째 글자가 貢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入貢은 '조공하다'란 뜻이고, 于는 '~에'란 뜻이다.

김병기는 파(破) 자리에 원래는 우(于)가 있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파(破)는 돌 석(石)과 가죽 피(皮)로 되어 있다. 于를 방패 간(干)과 구별하고자 于의 아래쪽 끝부분을 왼쪽으로 길게 늘려 쓰면 皮의 안쪽 부분처럼 된다. 于와 皮가 형태적으로 비슷한 점을 이용해 于를 皮로 변조한 뒤 왼쪽에 石을 붙였을 거라는 게 그의 말이다. 이러다 보니 破가 왼쪽으로 치우치게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원래 글자가 入貢于였을 거라는 김 교수의 해설은 완벽한 설득력을 갖지는 않지만, 그의 말처럼 변조됐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주장에 대해 현재로서는 유보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渡海破가 원래 글자가 아닐 거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보다 높은 신뢰를 보낼 수 있다. 이전부터 학계에서 유사한 지적이 있었고, 육안으로 봐도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병기 교수는 '□□新羅'가 '가야·신라'일 거라는 전제 하에 원문 B를 이렇게 해석했다.

"왜국이 신묘년 이래로 백제·가야·신라에 조공을 했으므로 (고구려가) 일본을 신민으로 삼았다."

전통적으로 고구려 속국이었던 백제·가야·신라에 대해 일본이 신묘년 이후로 조공을 했으므로, 그때부터는 고구려가 일본까지도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문맥과 불일치한다.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가 백제·신라를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김 교수의 해석을 따를 것 같으면 문장 뒷부분에서 가야라는 새로운 변수가 돌출하는 데 이어, 문장의 결론이 왜국에 대한 행위로 끝난다. 문장 앞부분에서는 백제·신라와의 관계를 꺼내놓고, 뒷부분에서는 왜국과의 관계로 결론을 내렸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의 해석은 전체 문맥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 당시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니...

김병기 교수는 광개토태왕릉비에 대한 일본측 해석의 오류를 한층 더 명확히 부각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원래 글자를 入貢于로 추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보강 설명이 필요하고, 전체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해석한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 기록물에서 글자 일부가 불명확해서 제대로 해석할 수 없을 때는, 전체 문맥을 살펴보거나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는 수밖에 없다. 광개토태왕릉비처럼 원문 훼손이 많은 경우는 특히 그렇다.

이 비는 장수태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릴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 비석이 일본의 한반도 정복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주장하지만, 장수태왕이 비를 세운 목적은 신묘년을 포함해 아버지의 재위기간에 이룩된 업적을 만천하에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광개토태왕이 등극한 해에 고구려가 신하국인 백제·신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그 뒤에도 되찾지 못했다면, 아들이 아버지의 업적을 집중적으로 담은 이 비문에 그 사실을 기입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기입할 수밖에 없었다면, 아버지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뭔가 한마디 변명이라도 적어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또 비문에 대한 일본측 해석을 뒷받침할 별도의 증거가 나오지 않은 이상, 당시 일본의 국력이 대규모 수군을 이끌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할 만한 정도였는지도 검토해야 한다. 이도상 원광대학교 초빙교수가 2002년에 <동아시아 고대학> 제6집에 기고한 '광개토호태왕 비문 신묘년 기사 검토'에 이런 대목이 있다.

"4~5세기 일본 열도는 아직 육로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상교통을 통하여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야 정복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출토되는 배는 통나무배뿐이었으므로 ······ 야마토 정권의 통일국가 형성뿐만 아니라 한국 출병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하다."

통나무배 정도밖에 만들지 못한 당시의 일본이 대규모 수군을 동원해 한반도 남부의 강력한 국가들을 연달아 정복할 수 있었겠느냐는 지적이다. 소규모 왜군 병력이나 해적들이 신라를 공격하는 것은 가능해도, 백제·가야·신라 전체를 공략하기에는 일본의 국력이 너무 미약했다는 것이다.

또 391년 이후에 일본이 백제·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해석은 객관적 사실관계와도 불일치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392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위협을 줄이고자 왕족인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신라가 왜국의 속국이 됐다면,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또 393년에는 왜국 군대가 신라 서라벌을 포위했다. 신라가 391년 이후로 왜국의 지배를 받았다면, 불과 2년 뒤에 이런 일이 생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국이 자국 지배 하에 있는 서라벌을 포위했다는 것은 얼른 납득되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은 주장... 하지만 의미는 있었다

이렇게 신묘년 기사에 대한 일본측 해석은 비문의 전체 취지와도 맞지 않고 역사적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 거기다가 해당 기사가 변조됐을 가능성마저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도 극우적인 일본인들은 이를 근거로 한반도 침략의 당위성을 이끌어냈다.

아베 신조 정권이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전쟁하는 국가로 만들고 자위대를 일본 국군으로 재편하면, 주변 지역을 향한 일본의 팽창 욕구가 한층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광개토태왕릉비 신묘년 기사를 거론하는 일본인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 때에 대비해서라도 이 문제에 대한 국민과 학계의 관심이 더욱 더 커져야 한다. 일본이 광개토태왕릉비를 변조해 한반도 침략 명분을 강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비문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김병기 교수의 주장은 아직 완벽하지는 않아도, 논의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노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출처: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93606&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top1&CMPT_CD=E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