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4. 목. 맑음
박종철이 죽음으로 지킨 선배의 '변절', 그는 < 1987 > 볼까
[리뷰] 누구나 박종철이 될 수 있었던 시대, 영화 < 1987 >이 남긴 것
'초전에 박살났어! 그놈들은 인간백정들이었어!'
송파보안사에 끌려간 그는 야구방망이로 온몸을 구타당하고 전기고문 2차례,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코에 붓기 5차례 등 일주일 동안 고문을 받으며 허위자백과 수배자 은신처 위치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군사정권은 5.3 인천 투쟁의 배후로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을 지목했고 김문수는 서노련 지도위원이었다. 당시 민주진영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민중의 소리> 17호(발행인 문익환)는 '보안사, 살인적 고문으로 민중 민주화 운동탄압'이라는 제목을 달고 김문수 지도위원의 고문 내용을 생생하게 적었다.
▲ 1986년 진실을 알렸던 유인물문익환 목사님이 발행인이였던 '민중의 소리'는 당시 진실의 전파자 역할을 했다. 1986년(1988년은 잘못 인쇄된 듯)5월 25일 발행된 유인물에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 문익환 목사님의 구속 등 급박한 정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안호덕
누구나 박종철이 될 수 있는 시대였다
영화 < 1987 >을 보면서 5.3 인천 항쟁을 생각했다. 1986년이었으니 내가 대학 2학년 때 일이다. 군부독재를 상대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야당 성토가 대규모 정권 타도 투쟁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김문수 등 노동운동가 40여 명을 고문·구속하고,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한 권인숙씨를 성고문하며 5.3 인천사태 관련자 행방을 종용했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어쩌면 진작 생겨났을 일, 영화 속 그들의 대화처럼 정권을 지키는 애국 행위에 한번쯤은 터질 수 있는 일이었다.
박종철의 죽음을 안 건 TV나 신문이 아닌 선배가 전해준 유인물에서였다. 몇 번이나 꼬깃꼬깃 접혀서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나에게 온 유인물에는 방송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죽음의 진실이 있었다. 남영동, 물고문... 이런 낱말들이 배열된 소식을 전해주면서 선배는 후배에게 투쟁심을 기대했을 테지만, 나는 오히려 두려웠다. 누구나 박종철이 될 수 있는 시대였고, 군 미필이었던 나는 강제 징집되면 녹화사업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영화 <1987> 포스터ⓒ CJ 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영화 < 1987 > 속 연희의 운명처럼, 눈감고 귀 막는다 해서 외면할 수 현실은 아니었다. 방학 때였기에 잠잠하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개학과 더불어 본격적인 투쟁이슈로 떠올랐다. 4.13 호헌 조치는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호헌철폐, 정권타도를 요구하는 대자보가 게시판을 메웠고, 옥상에서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학내에 상주한 사복경찰과 학교직원들은 유인물 배포자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버스 천정 환풍기에 유인물 뭉치를 물래 끼워 놓고 내리면, 차가 출발하면서 뿌린 듯 날렸다. 경찰들은 범인을 찾으랴, 떨어진 유인물 수거하랴 정신없었고, 시민들은 유인물을 얼른 주머니에 숨겼다. 짜릿한 순간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두명씩 짝을 지어 유인물을 집안으로 몰래 던져 넣는 '가피'(가는 집(家)의 한자어. 피는 유인물의 은어다)작업을 했다. 요즘같이 CCTV가 곳곳에 있었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겠지만, 30년 전이라 대문 밖으로 불쑥 달려오는 개만 조심하면 됐다. 그러나 매번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잡히면 신나게 얻어맞고 구류 며칠은 각오해야 했다.
▲ 87년 7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소식지이한열 열사의 민주국민장에 150만 인파가 모였다는 소식. 제주에서 열린 이한열 추모집회에 경찰이 난입 무차별 폭력을 자행했다는 소식 등이 보인다ⓒ 안호덕
87년 6월 항쟁은 6월 10일 하루의 투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시대 배경은 86년 12월부터 87년 6월까지다. 80년 광주학살과 저항, 이후 진상규명과 반독재 투쟁, 5.3 인천항쟁과 서노련 사건,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 6.29 선언과 야당분열, 대선 패배까지. 영화 < 1987 >은 대하소설 같은 30년 전 역사의 가장 아프고도 빛나는 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택시운전사> → <변호인> → <남영동 1985> → < 1987 >→ < 26년>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채워야 할 이야기와 진실은 너무 많다.
영화 < 1987 >, 영화 같았던 '2017'
맞고 고문당했던 사람들이 변절했다. 노동운동의 대부라고 불리던 김문수. 그는 80년 노동운동의 김근태로 불렸다. 그런 그가 '인간백정'을 부려 자기를 고문했던 군사정권과 야합해 탄생한 신한국당에 입당해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김문수만도 아니다.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으면서도 보호했던 선배 박종운은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에 국회의원에 여러 번 출마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정치에 몸 담는 것이야 본인의 선택이지만, 고문했던 사람들, 후배를 죽게 만든 사람들과 한통속으로 정치를 한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김문수도, 박종운도 이 영화를 볼까?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악취미를 가진 사람처럼 물어보고 싶다.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이 열린 2011년 1월 14일 오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이 박종철 열사를 고문해서 소재파악을 하려고 했던, 학교 선배인 박종운 당시 한나라당 경기도당 서부지역 총괄본부장이 헌화를 하고 있다.ⓒ 권우성
▲2004년 총선 당시. 좌부터 박종운(오정). 박근혜 대표. 임해규(원미갑). 김문수(소사)ⓒ 양주승
영화 < 1987 >은 관객을 6월 10일 시청 앞마당에 세워놓고 막을 내린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87년 6월 항쟁의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야당분열로 또다시 노태우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후 3당 합당이 이뤄졌고, 군사정권의 막바지였던 91년에는 또 숱한 사람들이 죽었다. 87년 6월 항쟁이 온전한 승리였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음지였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 '87년 6월 항쟁이 미완이라도, 변절하고 등 돌린 사람들이 생겨났더라도, 민초들이 군사독재를 굴복시킨 역사는 여전히 위대하고 숭고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다시 표 한 장을 예매했다. 2017년 광화문광장에서 또 다른 항쟁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아이에게 줄까 해서다. 아빠는 이 시대를 이렇게 살았노라고, 영화 같은 무서운 현실에서도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군사정권과 맞짱 떴다고. 아빠 엄마와 손잡고 너희들이 만들어 낸 '2017'도 '1987'과 견줄 만한 위대한 역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날 문익환 목사님의 피맺힌 절규와 광화문 광장 무대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애끓는 호소가 다르지 않음을, 영화를 보고 나온 아이와 맥주 한잔하면서 진지하게 이야기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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