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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사람 사는 세상

한국어와 티베트어의 관계

2017. 3. 30. 목. 맑음

시간 날때 가끔 "붕정만리 "선생의 블로그에 들립니다.

참으로 많은것을 배우고 있고 자료의 방대함에 놀라고

쉽게 설명해 놓으신것에 감탄합니다.

아래 내용은 오늘 퍼온것 입니다.


조금 전 이웃블로거 분의 블로그에서 타밀어와 한국어에 대한 자료를 봤다. 위에 링크된 원 자료 사이트에서 한국어, 타밀어, 티베트어의 단어 비교를 보게 되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정작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관계가 아니라 한국어와 티베트어의 관계였다.

어느 정도 나이드신 경상도 분들이면 아시겠지만, 예전에 시골에서는 부엌을 '정지'라고 했고 변소를 '통시'라고 했다. 또한 간장을 의미하는 '지렁'도 사용했었고, '조푸'도 두부를 의미하는 사투리였다. 그외 다른 할배, 할매야 지금도 쓰는 말일테고...

티베트족의 선조인 羌族은 서역에서 월지족과 같이 생활했었고, 그런 까닭에 원래 월지족의 조장(혹은 천장) 풍습이 아직도 티베트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책에서 밝힌 바 있지만, 이렇게 사용하는 단어까지 같을 줄은 몰랐었다. 허긴 진작 알아보지 않았던 내가 바보지... ㅠㅠ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도 훨씬 이전에 이미 우리 조상들은 콩을 이용한 발효식품을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놀라워라!!!

소월지는 강족한족과 섞여 살았으며 의복음식언어는 강족과 비슷했다. 크게 7개 부족이 있었는데 황중(湟中), 영거(令居) 일대에 살았다. 장액군(張掖郡)의 수백 호는 의종호(義從胡)라 불렀다.[1]

출처 : 위키백과_월지

소월지는 의복, 음식, 언어가 羌族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강족은 티베트족의 선조이다.

즉 타림 분지 인근에서 소월지가 강족과 같이 생활할 때부터 언어가 비슷했던 것이다.

[출처] 한국어, 드라비다어, 티베트어 비교|

작성자 붕정만리 http://blog.naver.com/brucelee55/220617855293



아래는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월지족"에 대한 내용입니다.

월지

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

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는 고대 중앙 아시아의 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 1세기 경, 북아시아, 중앙 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 민족과 그 국가를 이른다. 월지라는 명칭은 한자로만 전해 내려오며, 그들의 종족적 기원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월지는 원래 중국의 감숙 성의 서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모돈 선우(묵특선우) 시기에 서방으로 쫓겨 가고 명칭을 대월지로 변경한다. 이후 박트리아에 자리잡은 대월지의 일부는 인도로 들어가 쿠샨 제국을 건설한다.



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


기원 전 3세기경 타림분지에 거주지를 두고 동서무역을 독점하여 당시에는 흉노를 압박할 만큼 강세를 유지했다.

이후 사기에 따르면, 묵돌 선우(재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176년) 말기에 월지는 흉노에 패배하여 서쪽으로 쫓겨난다. 아울러 월지 지배하에 있던 서역의 나라들도 흉노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 이때 일부가 남아서 서쪽으로 간 세력을 대월지(大月氏)라고 하고, 남아 있던 부족을 소월지(小月氏)라 불렀다.

기원 전 162년 묵돌(冒頓)의 아들, 노상 선우의 공격을 받고 왕이 살해되었다. 이때 노상 선우는 패배한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한다. 패배한 월지는 더욱 서쪽의 아무르강(阿母河) 주변 소그디아나로 벗어나고, 이 땅에서 대월지는 대하(박트리아)를 정복하고, 대월지국을 세워, 중계 무역으로 자리를 잡는다.

기원 전 130년경 전한의 장건이 반흉노 동맹을 제안하러 가지만, 이미 안주할 땅을 손에 넣은 대월지는 단호히 동맹을 거절한다.

기원 전 1세기경, 토하리인의 쿠샨 왕조가 강대해져, 이 땅을 쿠샨 제국(귀상)이 지배하고, 동서교역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은 이 쿠샨 왕조도 대월지라고 불렀다.

소월지는 강족, 한족과 섞여 살았으며 의복, 음식, 언어는 강족과 비슷했다. 크게 7개 부족이 있었는데 황중(湟中), 영거(令居) 일대에 살았다. 장액군(張掖郡)의 수백 호는 의종호(義從胡)라 불렀다.[1]


토하리인과의 관계

대부분의 학자들은 월지족이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보고 있고, 고문헌의 토하리인(Tocharians)과 같거나 긴밀히 연결된 종족으로 믿고 있다. 중앙 아시아 연구가인 르네 그루쎄는 당시 중국 문헌과 서방 측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월지는 토하리인과 함께 인도-스키타이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한 예로 당시 그리스의 사가 프톨레마이오스는 월지의 영역을 토가라(Thogara)로 기록해 두었다. 또한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박트리아의 침략 민족을 토하로이(Tokharoi)라고 부르고 있다. 이 때는 월지가 대하를 정복하고 대월지를 세운 때와 일치하고 있다.

한편, 르네 그루쎄에 따르면 감숙 성에 남아있던 소월지는 이후 쿠차와 연관이 있다. 이들은 당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실크로드 지역 최동부의 인도유럽어족 국가로 남아 있었다.

같이 보기

사마천사기 대완열전에 의하면 본래 월지국(월씨국)은 중국 감숙 성의 둔황과 기련산 사이에 나라를 세웠으나

흉노가 묵돌(모돈)이 선우(단우)가 되고 강성해진후 그 아들 노상선우에게 패해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간다

서쪽에 정착한 대월지의 남쪽에는 대하, 서쪽에는 안식(파르티아), 북쪽에는 강거가 있었으며, 동쪽 3천리 떨어진 곳엔 대완(대원)이 있었다.

한무제가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할 당시의 흉노 영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염택(로프노르 호수)의 동쪽에서부터 한나라의 농서(섬서 성 서쪽)의 장성까지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강족(티베트, 사천 성)에 접하여 한나라의 서쪽 진출을 막고있는 형세였다

출처: https://ko.m.wikipedia.org/wiki/%EC%9B%94%EC%A7%80#cite_not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