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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 섬기기/제사, 묘사

성(姓)과 씨(氏)

2017. 3. 10. 금. 맑음


<()과 씨()의 유래>

 ()과 씨()가 옛날에는 달랐다고 하는군요. 고대 중국 하(), (), () 시대까지는 성과 씨를 구분하여 사용했다고 하는데, ()은 어머니가 누구냐 하는 것을 표시했고, ()는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을 표시했답니다. ()이 같은, 즉 엄마가 같은 남매는 서로 결혼을 못 했지만 씨()가 같은, 즉 아빠가 같은 남매는 서로 결혼할 수 있었다네요. 또한 성()은 진정한 가족관계를 표시하는 것이라고도 하였고, ()는 귀천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남자가 시원찮으면 그 자식은 이름만 있고 씨()가 없는 천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춘추전국 시대부터 성()과 씨()의 개념은 약간 바뀌는데, ()은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는 것이고, ()는 왕 전하가 내려 주는 것으로 정리되었지요. ()으로 쓰이게 되는 글자는 대부분 한 글자로 쓰면서 처음부터 약간의 차별이 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성()과 씨()가 통합되어 성씨(姓氏)’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씨() 가진 쪽의 자존심 세우기 위한 것이었을 뿐 이 전통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당나라가 신라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정리한 후에 의자왕과 보장왕의 조상에게 똑같은 부여국 출신이라 하면서 모두 부여(夫餘)라는 두 글자 자리 씨()를 주었습니다.

 

그동안 성씨를 쓰지 않던 신라도 뒤늦게 국제화를 한다면서 귀족 중심으로 성씨를 만들어 써야겠다고 했는데요, 기왕이면 촌스러운 부여 씨, 흑치 씨 같은 것보다는 당나라 황제가 하사하는 한 글자 자리 성()이란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여 측천무후에게 청원을 넣었지요.

 

측천무후는 꼴 보기 싫은 당나라 기존 귀족들의 번성보다는 변방의 정권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신라가 원하는 그대로 승인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라에서 이미 수백 년 전에 돌아가신 임금님의 조상들에게는 박(), (), () 같은 한 글자 자리 성()을 만들어 올릴 수 있게 되었고 당시 막강한 6개 귀족들의 조상에게도 이(), (), (), (), (), () 등의 한 글자 자리 성()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지요. 하늘에서 알이 떨어져서 어찌어찌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시 수백 년이 지난 뒤에 누군가가 다 만들어 넣은 이야기로 봐야겠지요.

 

당나라도 비실비실, 신라도 비실비실해질 때에 왕건의 고려가 건립되는데, 이 때에 왕건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개국 공신들에게 기분 좋게 성()들을 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29명의 부인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아들, 딸을 낳아 고대 중국의 풍속을 부활시킨다면서 수많은 남매들끼리 엄마만 서로 다르면 마구 서로 결혼을 시키곤 했답니다. 그래서 왕건의 아들 광종(4대 임금)은 이복 남매 대목왕후 황보(皇甫) 씨와 결혼을 했고, 또 누구는 조카와 결혼하고... 하여튼 좀 많이 복잡했었지요.

 

, 잠깐이요! 똑같은 왕건의 자식이라는데 어찌 황보 씨가 있냐구요?

 

우와아, 정말정말 예리하시군요. 그것은요, 왕건은 아들들만 왕씨로 하였고, 딸들은 모두 자기 엄마의 성씨를 주어 버렸거든요. 또 외할머니 쪽의 힘이 더 세면 외할머니의 성씨를 주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29명의 부인에게서 나온 딸들의 성씨가 다 달라지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수많은 아들딸의 힘센 외가들끼리 서로 사돈을 맺었지요.

 

아무튼 왕족이니 귀족이니 양반이니 하는 사람들만 성씨가 있었고, 나머지 일반 평민들은 돌쇠나 삼월이처럼 그저 이름만 있었지요. 일본도 우리처럼 성씨가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1860년대에 세계일주를 다녀 온 사람들의 건의를 받아 성씨란 것을 뒤늦게 만들었다는데요, 각 지방 성주들 책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본은 성()이란 것은 없고 씨()만 있는 나라가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지금도 일본 아이들 출석부에는 씨명(氏名)만 있고 성명(姓名)은 없답니다.

 

어쨌든 몇 십 년 후 조선 양반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여 일본이 쳐들어와서 대한제국, 독립문을 만들게 해 주고 평민들의 해묵은 소원을 들어 준다면서 19093월 민적법을 공포하게 하여 각자 성씨와 이름을 관청에 신고만 하면 다 민적(현재의 호적)에 올려 준다고 했지요.

 

대대로 양반의 횡포에 시달려 왔던 평민들은 일제히 양반의 성씨를 얻어 와서는 다들 양반의 자손이 되고자 하는 통에, 8만 여 개의 새로운 씨()를 창씨(創氏)하여 다양하게 나누어 가졌던 일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양상이 전개되는 통에 일본 측 행정 도우미도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510일 민적부가 완성되었을 때에 성씨가 없는 사람이 56%가 되어 성씨 있는 사람의 1.3배가 되었다고 하는군요. 곧 한일합방이 되어 세계지도에 우리나라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뒤에도 신생아를 민적부에 등록할 때 김----정 등 일부 성씨로만 몰리는 바람에, 현재도 이들이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가문 중시 또는 성씨 편중 현상이야말로 가히 세계 제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법적으로는 그 많던 돌쇠나 삼월이의 자손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모두가 양반의 자손이 되어 전 국민이 제사를 지내는 세계최고 양반의 나라가 되었답니다. 다들 뼈대 있는 양반의 자손이 되었으니만큼, 하는 행동들도 좋은 쪽으로 흘러가 주었으면 딱 좋겠네요.

 

글쓴이 : 황재순(문학박사) / 인천교육청 장학사, 부개고 교장


출처; http://www.ilec.go.kr/ndsys/ndbbs/bbs_view.asp?seq=30&bbs_code=Fboard_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