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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 섬기기/제사, 묘사

제사의 기원




제사에 관한 한 전 세계 민족 가운데 한국인만큼 관심이 많은 민족도 없을 겁니다. 명절마다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도 고향에 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때 조상이라 함은 막연한 조상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남편의 조상만을 말하는 것이지요. 엄마 조상이나 처의 조상들에 대해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이것은 가부장제의 영향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제사에 대해 그다지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제사는 무엇으로부터 유래되었나?



우리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제사. <출처 : wikipedia(frakorea)>


제사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제사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 문제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고 덕을 추모하는 게 제사일까요? 그러나 제사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제사가 단순한 것이었다면 구한 말 조선 정부가 제사를 거부한 그리스도교인들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삶은 대부분 정치적인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데 제사도 그런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조선의 정치체제를 알아야 합니다. 조선은 한 마디로 말해 ‘유교로 정치한 나라’입니다. 유교 정치의 근간은 가부장제입니다. 유교에서는 사회나 국가를 가정의 확대판으로 보기 때문에 각 가정이 잘 다스려지면 국가는 자동적으로 잘 다스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효가 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효를 준수할 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가부장으로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맏형이 그에 해당됩니다. 이 사람들은 가문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가문을 통치합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거역할 수 없습니다. 거역했다가는 가문에서 퇴출당하는데 그것은 사회적 죽음을 말합니다.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 나라의 가부장은 왕입니다. 그래서 왕은 절대 권력을 갖습니다. 그 권력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화되는데, 가장 초월적인 권위가 바로 제사에서 나옵니다. 왕이 드리는 제사는 종묘에서 하는 것이지요. 왕은 자신의 권력이 무궁한 조상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종묘에서 장엄하게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역대 왕들에게 지내는 것이니 얼마나 권위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어느 누구도 그 권위를 넘볼 수 없습니다. 같은 것은 집안 제사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조선조 때에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의 권위가 가장 강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뒤에 조상령들의 초월적인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출처 : wikipedia(joonghijung)>



이런 맥락에서만 보면 제사란 국가나 집안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 의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겠지요? 과거 양반들이 일 년에 수십 차례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사에는 좋은 것을 차려야 하니 돈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제사를 지내는 장남으로 하여금 유산을 더 많이 상속할 수 있게끔 법을 바꿉니다. 그래서 대략아버지가 가진 전 재산의 2/3 정도는 장남에게 주고 그 나머지를 다른아들들이 나누게 되지요. 딸에게는 한 푼도주지 않는 이런 상속법은 놀랍게도 1990년대 초반까지 지켜졌습니다. 이때가 되어서야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상속하는 쪽으로 법이 바뀌게 된답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상속법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전까지 아버지의 재산은 형제들에게 동등하게 상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딸도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딸들은 시집올 때 그 재산을 가져와 죽을 때까지 갖고 있다가 임종 시 자기가 주고 싶은 자식에게 상속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상속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재산권도 행사할 수 없었던 조선의 주부들과는 참 다르죠. 어떻든 상속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유교식의 가부장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의 종교적 의미
그렇지만 제사에는 이런 정치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는 종교 의례이니 당연히 종교적인 의미가 있지요. 제사가 종교 의례라고 하니 놀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냥 조상들을 생각하는 추모제라고 여겼는데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사는 간접적인 영생법입니다. 종교는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죽음 극복법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종교를 만들었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영생과 불멸을 꿈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다만 육체만 죽는 것이고 영체는 그대로 남아 사후에도 다른 형태로 자신의 삶을 이어갑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사는 ‘간접적인 영생법’이다. <출처 : wikipedia(JosephSteinberg)>



하지만 유교에서는 이런 영생법이 없습니다. 유교의 교리에 따르면 우리는 죽은 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공중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자신이 더 이상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교인들도 인간인 이상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겁니다. 이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유교인들은 자신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생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가통을 이을 아들을 그렇게도 바랐던 것입니다.
아들은 일 년에 서너 번씩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 부모를 기억해줍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일 년에 한두 번씩 아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제사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영생하는 방법은 제사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식(아들)의 입장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자식은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은 얼마 못 살다 죽는 그런 찰나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구한 먼 조상들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도 이렇게 자신을 기억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 자신의 사후에도 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도가 됩니다.
제사의 미래는?
제사의 의미가 이러하다면 제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까지 웬만한 집안에서는 제사를 4대 봉사, 그러니까 고조할아버지까지 지냈었죠? 사실 이것은 주자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이렇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3품 정도의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뿐이었습니다. 대신 아무 벼슬도 없는 거개의 보통 국민들은 부모의 제사만 지낼 수 있었는데, 이것이 인플레 되어 누구나 고조까지 제사 지내게 된 것이지요. 아마 누구나 다 양반이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제사 풍속은 앞으로 많이 사그라져 아마 1대 봉사, 즉 부모만 제사 드리는 것으로 바뀔 것이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려 해도 사촌이 만나야 하는데 요즘은 친사촌끼리도 잘 안 만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부모들과도 같이 살지 않아 그리 깊은 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 분들에 대한 제사가 사라질 밖에요. 게다가 지금은 다른 종교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제사를 통해 영생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가부장제도 역시 이전에 비해 심히 약해져 한국인들은 제사에만 집착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사회가 아무리 바뀌어도 부모를 추모하는 것은 바뀌지 않을 터이고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의례인 제사를 통해 계속해서 부모들을 추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의 미래입니다.

글∙사진∙그림
최준식|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 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발행2010.06.16.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2&contents_id=2980




조상숭배의 나라, 조상제사 지내는 세계 유일의 한국 된 까닭


“탁월한 학자·선비, 구국영웅이
오천 년 역사에 가득한데
왜 자기 가문 조상만 기리나
다 같이 숭배할 조상은 없는가”

지난 추석 명절을 잘 쇠셨는지, 부모와 일가친척은 평안하신지, 조상은 만나뵈었는지, 그리고 청명해진 가을밤 그윽한 달빛을 맞으셨는지. 우리 정서엔 꼭 들어맞는 이런 인사의 뒤편에는 앞앞이 말 못하는 갑갑증과 파열음이 꿈틀대고 있다. 부모, 친지와의 만남이 항상 저 환한 달빛과 같으면 좋으련만, 가족사엔 언제나 기대와 원망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서로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게 명절이다. 말이 명절(名節)이지 수백 년 대물림된 행사를 치러야 하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뭇한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한국만큼 명절이 제례(祭禮), 특히 조상 제사로 일관되는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말 개화기 선교사들은 아름다운 자연과 미몽의 백성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나라’로 뭉뚱그려 묘사했는데, 세계에서 유례없는 조상숭배 열기만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유교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은 물론 주변국인 일본과 월남에서도 조상 제사를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교문화권, 아니 세계에서 한국이 조상 제사를 지내는 유일한 나라가 된 까닭,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위패 앞에 은덕을 비는 나라가 된 까닭을 정작 우리도 잘 알지 못한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풍경인가라고 어른들은 짐짓 위엄스러운 표정을 짓겠지만, 남녀 간 불합리한 역할, 가족 간 불공평한 노력봉사와 비용조달에 가슴앓이하고 시간을 쪼개 품앗이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소소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게 요즘의 추세다. 아마 귀경길에서 언쟁깨나 했을 부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의례에 쏟아붓고 허둥지둥 돌아설 때 그런 회의가 들지 않겠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유별난 ‘조상숭배의 나라’가 되었을까?

1894년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오백 년 도읍지 한양에 종교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종교 없는 제국은 없다는 문명사적 시선으로 보면, 사찰은커녕 공자 사당 하나 없는 유교국가의 수도가 이상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무속과 민간신앙에 푹 빠져 있는 조선인들을 목격했다. 콜레라가 습격한 마을엔 고양이 그림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가는 곳마다 무당이 있었고, 으슥한 곳마다 귀신이 살았다. 귀신 종류도 다양해 그녀는 36가지 귀신 이름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이 과도한 무속과 민간신앙을 조상제례로 전격 대치한 계기가 바로 조선 건국이다. 고려 말까지도 명절은 하늘과 자연을 경외하는 집단축제였다.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한 조선은 민간신앙을 일소할 방법을 주자학에서 찾았다. 제천(祭天)과 제사(祭祀)가 그것이다. 경복궁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하늘신과 토지신에게 제례를 올리고, 좌측에 종묘를 지어 제사의 기원을 마련했다. 15세기 말 성종은 아예 『경국대전』을 편찬해 국법으로 반포했다. 예제(禮制)에 이런 조항이 있다. ‘6품 이상 문관이나 무관은 3대까지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일반 서민은 부모에게만 제사 지낸다.’ 잡신을 섬기는 자는 처벌되었다. 빈곤한 서민은 위패를 모시고, 명절 땐 두어 가지 음식으로 족했다. 굶는 판에 더 차릴 것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양반이 향촌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봉제사는 충군효친의 규율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격식과 요란한 상차림이 강제됐다. 조상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경쟁으로 변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게 특징이다.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불교와 주술신앙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미국 선교사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기』에서 ‘코레아인들은 사회생활에서는 유교에, 사고방식은 불교에 속하며, 곤경에 빠지면 귀신을 믿는다’고 썼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귀신을 믿는 사람은 이제 없어졌고, 외래종교가 유입되자 한국은 다종교사회로 변했다. 그런 와중에 유교는 제천(祭天) 기능을 다른 종교에 넘겨주고 주로 생활의례, 특히 제례(祭禮)로 살아남았다. 명절이라는 축제의 시간을 제사로 종종걸음을 쳐야 하는 ‘조상숭배의 나라’가 된 역사적 배경이다.

이런 내력을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조상을 기리는 방식은 여럿인데 왜 반드시 상차림 형식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조상숭배가 왜 자기 가문(家門)에만 국한돼야 하는가. 전자는 덮어두고라도 후자는 의미심장하다. 탁월한 학자와 선비, 그리고 민족 영웅과 구국의 정치가들이 가득한 오천 년 역사에서 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할 선현들을 기리는 데는 인색했다. 명절마다 천여만 명이 이동하고, 집집마다 족보 하나쯤은 갖춘 세계 유일의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다 같이 숭배할 조상이 이처럼 없는 것도 너무 특이하지 않은가.


출처 http://blog.daum.net/whdnsdnjf/252



제사의 기원
먼저, 조상 제사가 효의 척도인 것처럼 알면 안 된다. 제사가 없는 민족은 미개하거나 우매하거나 불효 막심한 막나니라고 말하면 안되며, 또한 조상 제사만 하면 효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조상제사에다가 자기의 효심을 모두 건 것 같이 행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은 실상은 불효자였던 것을 왕왕 볼 수 있다.

1. 祖上 祭祀는 輸入된 禮法이다.
대개 제사를 우리 나라의 고유한 전통인 줄 알지만 실상은 외래에서 수입된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왔어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문화 전통이 된다고 하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제사의 오랜 뿌리는 중국의 고대부터이다. 그런 제법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에 대하여 사가(史家)들의 연구한 바에 의하면, 고려조 말기 이전까지는 제사흔적을 찾을 수 없다가, 고려 말기에 나타난다고 한다.

중국의 제사 기원은 공자 이전, 하 나라와 상 나라 때부터라고 하며, 시황제는 천제(하나님께)를 드렸는데 그것이 조상 제사, 그것도 왕의 조상 제사로 발전되고, 유교 사상이 정립되면서 그 기틀이 잡히고. 주 나라 때에 와서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조상 제사도 지금처럼 죽은 자 위한 제사가 아니고, 종손을 높이는 의미로 부모를 높은 곳에 앉히고 제사 형식의 예를 올렸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백성이 아닌 황제에게만 적용되던 제사가, 그렇게 해야 후손이 잘 된다는 유혹을 받은 제후들이 따라서 하게 되었고, 춘추전국시대에 무너지는 사회질서 속에서 평민들도 자기의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다투어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후에 죽은 부모에게로 발전된 것으로서, 제사 관습은 계급 제도의 결과인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제사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기는 훨씬 후대인, 송 나라 때에, 주자학(朱子學)을 창안 한 주희(주자)였다고 한다. 이것이 주자학과 함께 우리 나라에 도입되어 이 퇴계에 의하여 '성리학'으로 정립되고 아울러 제사 법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특수한 사람에게만 제사가 들여지다가 유교를 국교로 삼은. '이 태조(이성계)'에 의해 민간에 널리 장려되었고, 이후에도 제사문제는 많은 굴곡을 겪으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 제사이며, 그것도 처음엔 죽은 조상이 아니라 산 부모에게 제사 하여 존숭의 한 예였다는 것이다.

2. 祖上 祭祀의 擴散
그렇게 전래된 제사가 전 국민에게 확산된 데는 부모에게 효를 하게 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정치적 안정을 노린 정치적 술수였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권자가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민 정책을 쓰기도 한다.

고려말의 왕씨 정권을 무력으로 탈취한 이성계가, 도덕성이 문제되어 민심이 이반되자 정권의 유지를 위한 묘안으로 내 놓은 것이 온 국민을 제사할 수 있게 한 것인데, 그 묘안은 이성계의 자문이며 우인이요 국부로 여기는 '무학대사'가 제안했다고 하는데.
무학이 왈 "정권은 칼고 잡을 수 있으나 이반 된 민심은 칼로 잡을 수 없으니 간접적인 방법을 쓰세요' 자고로 이 백성은 조상에 대한 효가 극진하오니 이를 장려하면 옳게 여길 것이외다" 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조상 제사를 더 많이 하도록 권장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3. 祭禮의 內幕
국민들에게 제사를 권장하면서 아울러 제사 床의 규례도 제안했다는 것이다. 젯상의 필수와 여타를 제시했는데, 그 필수 제수 품은 '대추 밤 감'이란 것이다. 거기에는 의도가 있는데, 대추는 씨가 하나라 "이 나라의 임금은 오직 하나다" 라는 것이요. 밤은 한 송이에 세 알맹이로서 "삼 정성을 둔다"는 것이며. 감은 씨앗이 여섯 개라 "육 판서를 두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의도로 그렇게 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백성들이 제사를 지낼 때마다, "홀로 하나이신 왕이시여! 삼 정승, 육 판서를 거느리시고 왕의 나라가 태평성대하소서"하고 기원하는 예가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 수 없는 우매한 백성들은 제사 때마다 삼 실과가 빠지면 정성이 부실하고 여겨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음식은 적당하게 하드라도 그것만을 기필코 챙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수된 것이 오늘의 제사인데, 유독 우리민족, 자신만이 효성스런 자손이라고 자부하면서 제사를 울려 먹는다. 제사하는 자손이 거기 맡는 행실을 하는가 보라? 얼마나 보모 가슴을 후벼파고 욕되게 하고 가문을 어지럽히는가. 사람된 도리를 다 못하면서 효자일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제사를 신조(信條)처럼 여기면서 고집하는 것은, 아직도 태조 이성계에게 속고 있는 것이요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있는 것이 아닌 지 모른다.
 
儒敎 根本에 대한 이런 見解

유교가 수 천년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전신적 지주가 되어왔음에도 그 근원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업었다. 춘추시대 말에 노 나라의 공자가 당시 유학 서적들을 집대성하여 오늘날 유교회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은허의 갑골문 발견은 유교회 기원에 대한 설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이에 대하여 상명대의 김경일 교수는 그의 저서 "감골문이야기(서울:바다,1999)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서울: 바다, 2000)"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갑골문에 나타난 儒敎의 根源

1899년, 중국 베이징에 살던 공무원 왕이롱은 학질에 걸려, 특효약으로 알려진 묵은 거북 뼈 조각(敗龜版)을 사들였다. 그리고 식객으로 살던 한의사 리유 티 의원에게 점검을 부탁했다. 리유는 짐슴의 뼈 조각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왕이롱은 이 글자가 주(周)나라 문자 이전에 존재했던 은(殷)나라의 갑골문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 발견으로 중국 허난 성 안양 지역의 발굴이 시작되었고, 여기서 다량의 갑골문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갑골문의 2기와 5기에, 유교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주전 1324년에 중국 황하 유역의'은.' 지금의 안양에서 쿠데타가 있었는데, 공자(주전 551-479)의 시대보다 8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쿠데타의 전모는 이러했다.

중국 황하 유역에 상(商)과, 동이(東夷)가 있었다. 이 두 종족은 앙숙으로 전쟁에 전쟁을 거듭했다. 상은 황하神, 산신, 조상신, 천신 등을 수호신으로 삼았고, 동이족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 후에 상은 동이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내륙인 은(殷)으로 들어왔다. 상의 왕인 반경은 미신을 대단히 신봉한 사람으로 온갖 잡신을 다 거느렸다. 그가 죽자, 아들 무정이 역시 그 잡신들을 다 거느리고 날이면 날마다 제사를 지냈다. 무정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장자인 조강에게 왕위를 물려 주면서 똑똑한 또 다른 아들 조갑은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조갑은 결국 형 조강을 처치하고 왕위에 올랐다.

구데타, 조상 신...

왕이 된 조갑은 가장 먼저 제례문화를 정비했다. 그는 토템이나 황하신이나 천신 등의 잡신들에 대한 제례는 모조리 페지하고, 자신의 직계 혈족들에 대한 제례만을 강화했다. 즉 조갑의 조상신에 대한 제례만이 남게 된 것이다. 조갑은 자신의 조상신들이 전쟁, 농사, 날씨, 질병을 조절 할 수 있는 전능의 존재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위상을 강화했다. 이 조상신 숭배가 훗날 공자에 의해 유교 문화의 단초로 사용 되었다.

유(儒)는 은에서 출발한 주의 제례자들

조상신을 숭배하는 조갑의 나라를 은이라고 하는데, 이 나라는 다른 시들을 모시는 부족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이런 부족들 가운데 주(周)가 으뜸이 되어 결국 은을 멸했다. 이때 무(武)가 주의 왕이었고 은의 왕은 주(紂)였다. 그런데 주는 은의 제례 전문가들을 살려 두었다. 중원의 패자가 된 주는 외교, 전쟁, 농업, 수렵 등에 따른 제례 관련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儒)는 주 때에 나온 글자인데, 이것은 바로 은의 제례 전문가들을 말한다. 유는 人과 수(需)를 합한 말이고, 수는 우(雨)와 이(而)를 결합한 것이다. 이 글자들의 뜻은, 비를 다스리는 성인 남자인데 즉 무당을 말한다. 유란 결국, 은 나라 출신의 무당 집단으로 주나라의 제례를 관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유와 천자와 종법제도

주나라에서 자리를 잡은 유는 주나라의 족보를 제계화 했다. 이들에 의하여 주나라의 왕은 하늘이 되었고, 초월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천자(天子)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천자는 정치적인 존재이며 아울러 종교적인 존재였다. 천자는 자신의 아들들을 각 지역에 정치 책임자로 보냈는데, 이들이 제후들이다. 이 제후는 근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하는 종법(宗法) 정치의 핵심으로 훗날 동양 사회의 혈연주의의 시발이 되었다. 그런데, 제후들을 보낼 곳은 많은데 한 천자의 부인이 낳는 남자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음으로 자연스럽게 축첩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유교와 공자

공자는 주나라의 종법제도가 중원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던 때에 태어났다. 그는 주나라의 종법제도에 심취해 있었고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종법제도가 완벽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은나라의 모든 역사적 정치적 사건들을 미화했다. 결국 공자는 허구의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공자의 유교가 새로운 질서로서 대두되었다.

유교, 동중서에 의해 한(漢)의 정치력이 되다.

공자의 사상은 훗날 漢 에 전수되었다. 그 전수에 있어 큰 역할을 한 사람이 한 무제 때의 '동중서' 였다. 동중서는 대일 통론을 주장하면서 중앙집권 강화, 불필요한 사상 논쟁 금지를 역설했다. 유교의 가르침은 공자의 교훈이며 공자의 교훈의 요점은, 과거 무결점주의, 조상숭배, 수직윤리, 인과 의 등이라 했다. 동중서는 공자의 과거 숭배, 제례문화에 주술적 분위기를 첨가했고, 수직윤리와 조상숭배는 천명사상과 혼합시켰고, 인과 의는 대 국민 순화용으로 사용했다. 이로써 유교는 한나라에서 정치력을 확고히 얻게 되었다.

송의 주자 그 패배의식

이후 송나라 때 주자라는 사람이 자신의 우주론적 에세이에 담긴 서글픈 고독과 우울로 주자학을 주창하고 나섰다. 주자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땅을 빼앗기고 짱시 성에 내려온 송나라 사람이었다. 짱시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숲이 깊은 지역이다. 주자는 이곳에서 좌절의 시를 읊었는데 이것이 조선 500년을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내게 한 주자학이다. 이 주자학의 정치적 이슈인 '존왕양이'는, 조선시대 내내 왕실과 사대부들을 지배했고 이것은 쇄국정책으로 이어져 조선이 일본에 망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출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저자 김경일교수의 책에서 발췌
출처: 체르니츠(gjg6****)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105&docId=218838747&qb=7KCc7IKsIOq4sOybk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T6XqKlpVuEhssskbxXKsssssst4-342159&sid=jLVLhDzWg8QuR5duXnFOMA%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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